직장맘 '기쁜비'의 은퇴 후 세상 제대로 살기 준비 이야기

내 집안에 존재하는 것들도 내 계획대로 되는 건 없다

▲ '기쁜비'네 반려견 웰시코기 '골든이'의 모습 ⓒ기쁜비
▲ '기쁜비'네 반려견 웰시코기 '골든이'의 모습 ⓒ기쁜비

[로즈데일리] 아주 예전에 클레오파트라에 대한 책을 보면서 뱀을 키우고 싶다는 생각을 살짝 했다. 상당히 희귀하고 특별해 보이고 털도 없고. 그러나 당연히 '생각'으로 끝났고 실제는 뱀 사진 조차 그다지 보고 싶진 않다. 그 흔한 강아지 고양이는 한 번도 키워보겠다는 생각을 해본 적도 없고, 사실 좋아하지 않는다. 얼결에 견주가 된 지금도 산책하면서 많은 강아지를 만난다. 강아지를 선천적으로 좋아하는 견주는 꼬리를 흔들며 반기는 강아지를 쓰다듬어 주지만, 필자는 터치를 좋아하지 않아서 그냥 따뜻한(?) 눈빛으로 보기만 한다. 

사건은 권위자의 지시를 안따르는 똘똘이 둘째 아이(예측 불가에 근면 성실이 필요한, 3차 산업 시대에 태어났으면 정말 큰일 있었겠다 싶은 아이다)가 만들었다. 지난 21년 12월 미친듯이 강아지를 사달라고 졸라댔다. 재택 근무 중이었는데 정말 줄창 듣는 아이의 조름에 머리가 빙빙 돌 지경이었다. 강아지가 이 집에 들어오는 날이 엄마가 집을 나가는 날인 줄 알라고 단단히 거절을 했는데 놀랍게 아이는 이모를 꼬셔서 내 허락 없이 아기 강아지를 데려왔다. 

▲ 기쁜비네 거실에서 재롱부리는 골든 ⓒ기쁜비
▲ 기쁜비네 거실에서 재롱부리는 골든 ⓒ기쁜비

아직도 그날의 충격과 분노는 생생하다. 밤이 늦어져 어쩔 수 없이 하루 자고 일어났고 난 '너무도 생생한 불길한 꿈'을 꾼 줄 알았는데 어제 밤 본 그 인형 같은 아기 강아지는 실화였다. 얼마나 어이가 없던지. 딸아이가 커서 반대하는 남자랑 결혼한다고 난리칠 때 드는 엄마의 느낌이 이건가 싶었다. 분하지만 어쩔 수 없는. 

그렇게 집에 강아지가 들어왔다. 그렇게 5개월쯤, 예측했듯이 가장 반대한 내가 가장 해야 할 일이 많은 상태로 강아지는 커갔고, 준비가 안된 상태로 정말 날벼락으로 떨어졌기에 급하게 공부를 하고 훈련이나 중성화 수술 등을 준비했다. 그리고 강아지에 대해서 공부를 하다 보니 뭔가 찜찜했는데 이 아이가 '나'를 견주로 생각한다는 걸 깨달았다. 

아이들이 아무리 이뻐한다고 해도 주기적으로 시간에 맞춰 밥을 주고 산책을 시켜주는 등 뭔가 꾸준히 책임을 지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러다 보니 내가 밥을 주고 산책을 하니…강아지 입장에서는 내가 엄마였던 거다. 아이쿠…난 의무만 하지 안아주거나 사랑을 표현한 적도 없는데 나를 엄마로 알 거라니 안쓰럽기 짝이 없었다. 그리고 중성화 수술로 짧지만 중요한 수술을 겪으면서, 이 강아지가 이미 내 삶에 크게 들어와 있음을 깨닫게 되었고 우리의 관계는 바뀌었다. 아니 사실 그 전에 이미 애착은 있었으나 인지하지 못했고 수술방으로 가는 그 순간, “아…내가 너를 사랑하고 있었구나”를 공식적으로 깨닫게 되었다.

반려견도 가족이기에 삶에 주는 영향은 정말 막강하다. 당시 드디어 자가로 마련한 집에 입주했고 아이들도 어느 정도 커서 나름의 미니멀리즘을 추구하며 쾌적하게 지내던 중인데, 강아지는 모든 것을 도루묵으로 만들었다. 뽀로로 매트에서 벗어난 지 몇 년 되었다고…이번엔 개 매트를 깔아야 하고 배변 패드를 깔아야 하고…개털 날리고, 강아지 장난감이 바닥에 깔리고… 이갈이 할 때는 ‘아 이게 개판이라는 것이구나’를 깨달았다. 

초반엔 아침에 일어나자 마자 하는 내 일과가 어디에 배변을 해놨는지 찾아서 가족들이 밟기 전에 치우는 게 내 일이었다. 그리고 여행도 당연히 반려견 동반 가능한 곳을 찾게 되고. 물론 강아지가 있어서 활력이 있든 것은 많지만, 박물관, 미술관, 놀이공원, 호텔 등 갈 수 없는 곳이 많아지고, 대중교통 사용도 어려워 지는 등 너무도 제약이 많아 졌다. 

ⓒ기쁜비
ⓒ기쁜비

혹시 강아지를 키울까 고민하는 독자분이 있다면, 나는 아직도 말리고 싶다. 가족으로 들이기보단, 지인 중에 강아지 키우는 사람과 친해져서 그 강아지와 견주의 신뢰를 얻고 일주일에 한 두 번씩 놀아주기면 해도, 강아지도, 견주도 다 행복해할 것이다. 자기 아이보다 이모나 고모로서 조카를 예뻐해주는 정도로 말이다. 굳이 양육의 책임을 다 짊어질 필요가 있나…그리고 혹시나 마음이 바뀌면 본인이나 강아지에게 큰 상처가 될 것이다. 그걸 지켜보는 다른 사람들에게도.

애와 개를 기르다 보니 둘 중에 뭐가 낫냐는 질문을 받기도 한다. 필자의 회사 후배 중에는 간간히 딩크족이 있다. 아이는 정말 아담과 하와의 원죄의 결과로 보지 않고서 단지 혈육, 사랑만으로 보기엔 감당이 어렵다고 생각하기에 늘 내 편이 되어주는 강아지가 낫지 않나 싶기도 하다. 물론…신앙의 측면에서 아이를 낳는 것이 중하긴 하다마는. 

그리고 왜 강아지가 나은가 생각해보니, 순종하는 것(물론 우리 강아지는 산책도 자기가 가고 싶지 않은 길로 가면 떡하니 멈춘다. 아니..우리집은 무슨 강아지까지 자기 주장이 이렇게 쎈가…), 말대꾸하지 않는 것(흠…내가 먹을 때 자기도 내가 먹는 그것을 달라고 짖는데, 일종의 말대꾸인가?) 내가 한 잘못을 정말 진심으로 잊어주는 것 등등도 있겠지만 귀여운 외모와 이론적으로 나보다 빨리 생을 마감할 확률이 높다는 데 있지 않나 싶다. 
사람은 나이가 들면서 외모로 귀여움을 받기란 쉽지 않다. 물론…노모가 50대 아들을 귀여워 한다는 글을 보긴 했으나, 친자식이 아닌 옆집 50대를 귀여워 하시기엔 어려움이 있으실 거라 본다. 그러나 강아지는 나이 들어서도 참으로 귀염성 있는 사랑스러운 외모가 유지가 된다. 그리고 견종마다 다르지만 대략 20년 안짝으로 산다. 

영화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흐른다>를 보면, 치매에 걸리고 노약해진 벤자민은 아이 외모를 하게 되고 영략없는 아기와 같다. 그러고 보니 인간이 늙어갈수록 정신은 아이처럼 되는데 외모가 노인이 되다보니, 같은 기저귀를 갈아도 신생아 기저귀는 웃으면서 갈고, 노인의 기저귀는 기도하는 맘으로 갈게 되는 것 같다.

그리고 내가 강아지 관련된 온라인 카페 글을 보다가 울컥하게 되는게 아픈 강아지와 생을 마감한 강아지에 대한 견주의 슬픔이다. 이론적으로 아이들은 나보다 오래 살게 되고, 그 아이들의 끝을 모르는 게 정상이다. 그러나 강아지는 처음과 끝을 큰 이변이 없는 한 내가 보게 되니 죽음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고, 그러다 보니 지금 시간이 더욱 소중하게 느끼는 것이 아닌가 싶다. 자식에게 욕심을 내고 뭔가 걱정하는게 “나 죽은 다음에 사람 구실 하려면…”에서 온 것이 아닐까?

가까운 친구들에게 “혹시 내가 우리 강아지 죽고 pet loss니 뭐니 해서 또 강아지 들인다고 하면 뺨을 한대 갈겨달라”고 했다. 강아지가 죽는 것을 상상하면 벌써부터 가슴이 덜컥 내려앉고 화들짝 지금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생각하게 된다. 이 세상의 모든 생명은 죽음이 있는데, 죽음을 생각하고 그 대상을 보는 것과 현재만 보고 그 대상을 보는 것은 정말 다른 가치관을 가지게 한다.

Memento mori. 죽음을 인지하고 뭔가 선택을 하게 되면 뭔가 가치있는 선택을 할 수 있지 않을까? 죽음의 순간에서 ‘아 그때 돈 좀 더 벌어둘 걸’ 하는 마음은 안들 거 같다. 은퇴를 생각하면 가장 빨리 드는 의문이 ‘내 월급이 없으면 당장 뭔 일이 벌어질까?’인데 죽음의 시점에서 ‘그때 은퇴를 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로 질문을 해보고 싶다.

옆에서 햇빛을 직사광선으로 쬐면서 다리 쩍벌리고 마루에서 자고 있는 우리 상팔자 개팔자 이쁜 막내 강아지를 보면서 나는 이 순간이 소중함을 알려줌에 감사하다. 또 삶이 내 뜻대로 되지 않음을 매 순간 일깨워 줌에 감사하다. 그러나 강아지 키우는 건 말리고 싶다. 강아지를 너무 좋아한다면 유기견 센터에서 봉사하는 게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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